상처를 쥔 손을 가만히 펼 때
내 힘으로 털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비워진 빚을 확인하는 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하루 종일 억울한 말을 삼키고 돌아와 불 꺼진 방에 앉아 있을 때가 있습니다. 신발도 벗지 못한 채 가만히 있으면, 낮에 받은 모욕이 식지 않는 열기처럼 가슴 밑바닥에서 다시 치밀어 오릅니다. 그 밤에 가장 잔인하게 들리는 말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용서하라는 충고입니다.
잊으려 애쓸수록 마음에는 날카로운 돌멩이만 쌓여갑니다. 용서가 되지 않는 것은 내 마음이 유독 모질어서가 아닙니다. 살갗이 너무 깊이 베여 아직 피가 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용서가 안 되는 것은 당신이 매정해서가 아니라,
베인 자리가 아직 아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서로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라는 이 편지를 쓴 바울은 안락한 서재가 아니라 축축한 로마 감옥 바닥에 묶여 있었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씌운 이들과 등을 돌린 동역자들을 향해 저주와 원망을 쏟아낸다 해도 아무도 탓할 수 없는 자리였습니다.
쇠사슬에 묶인 채 바울이 본 것은 사람의 잔인함 너머였습니다. 미움을 꼭 쥐고 있는 한, 진짜 갇혀 있는 사람은 저 바깥의 가해자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그는 차가운 돌바닥 위에서 깨달았습니다.
독한 원망을 품고 사는 것은 상대를 벌하는 길이 아니라, 내 영혼의 감옥 문을 안에서 걸어 잠그는 일이었습니다.
미움을 쥐고 있는 것은 상대를 가두는 일이 아니라,
내가 머무는 방을 감옥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우리는 분노를 쥐고 있어야만 억울함이 증명되고 나를 지킬 수 있다고 믿습니다. ‘내가 먼저 풀어버리면 그 사람 잘못을 없던 일로 해주는 것 같잖아. 나만 바보가 되는 거잖아.’ 밤마다 베개를 적시며 되뇌는 독백입니다.
상대를 찌르려고 칼날을 거머쥐고 있는 동안, 정작 베여 피를 흘리는 것은 내 손바닥입니다. 상처 준 사람은 이미 잊고 일상을 살아가는데, 다친 나만 그날의 그 시간에 못 박혀 있습니다.
칼날을 쥐고 있는 동안 가해자는 어제를 지나가지만,
상처 입은 나는 그날에 묶여 피를 흘립니다.
성경이 말하는 용서는 내 안에 없는 아량이나 도덕심을 쥐어짜 내는 시혜가 아닙니다. 기필코 받아내려 움켜쥐고 있던 빚문서를 가만히 펴볼 때, 그 손바닥 위에서 이미 찢겨나간 나의 거대한 빚을 먼저 마주하는 일입니다.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마태복음 18:32–33)
바라보아야 할 곳은 나에게 빚진 사람의 뻔뻔한 얼굴이 아니라, 내 모든 죗값을 조건 없이 대신 갚으신 십자가의 못 자국입니다. 용서는 내 인품을 증명하는 자리가 아니라, 거저 받은 탕감의 크기를 기억해 내는 자리입니다.
용서는 내 안의 선함을 짜내는 고행이 아니라,
내가 먼저 받은 거대한 탕감 앞에 주먹을 펴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당장 상처를 잊으라거나 억지로 웃으며 악수하라고 다그치지 않으십니다. 찢긴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시기에,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로마서 12:19) 하시며 그 무거운 판결문을 달라고 손을 내미십니다. 심판의 권리를 주님께 넘겨드릴 때 비로소 내 영혼의 숨통이 트입니다.
상대를 심판할 권리를 하나님의 손에 넘겨드릴 때,
내 손바닥을 파고들던 손톱자국이 비로소 아뭅니다.
오늘 당장 그 사람을 찾아가 포옹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다만 하얗게 질리도록 쥐고 있던 분노의 청구서를 십자가 발치에 내려놓는 것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나를 먼저 살리신 넉넉한 은혜 안에서, 쥐고 있던 손가락의 힘을 천천히 풀어봅니다.
“주님, 내 힘으로는 놓을 수 없던 분노의 빚문서를 십자가 앞에 내려놓습니다. 나를 먼저 용서하신 사랑 안에서 아픈 주먹을 폅니다.”
손안의 빚문서 내려놓기
그동안 내 손바닥을 파고들며 아프게 했던 마음의 짐들을 가만히 골라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쥐고 있던 빚문서를 놓았습니다
이미 용서받은 손으로 이제 용서할 수 있습니다.
억울한 말을 삼키고 돌아와 홀로 밤새워 울던 서러운 마음을 고백합니다.
내 아량으로 용서해 보려다 메말라버린 무력함을 불쌍히 여겨 주소서.
갚을 길 없던 내 허물을 조건 없이 덮어주신 십자가의 은혜를 먼저 보게 하소서.
심판의 자리를 주님께 맡겨드리오니, 내 손바닥을 찌르던 주먹을 펴고 쉬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묵상을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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